모두가 ‘저자’, 책마을해리의 꿈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책마을이 있다. 아니, 책마을 임을 표방한 헌책방이나 서점 집성촌이 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책마을을 비난할 의도는 없다. 일상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진귀한 책들이 건물 안에 가득 쌓여져 있다면 그 자체로도 책 좋아하는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고 출판의 역사에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책마을해리 촌장, 이대건씨.

상상했던 것 이상의 책마을을 만나다

그러나 책마을해리는 보다 본연의 가치, ‘책을 읽고, 쓴다, 그것을 계속 한다’는 것의 가치를 추구하는 책마을이다. 책마을해리에서는 글쓰기 프로그램, 출판편집 학교, 작가들이 책마을에 머물며 작품을 완성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 책과 관련된 책 영화제, 책과 함께 휴식을 취하며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북 스테이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일년 내내 열린다.

지금으로부터 12여년 전쯤 서울에서 출판사를 다니던 이대건씨는 책마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전북 고창의 시골마을인 해리로 내려와 폐교가 된 지금의 책마을 건물과 그 부지를 인수했다. 책마을해리를 방문하기 전만 해도 탐방단은 그저 책을 많이 모아놓거나, 독립서점처럼 조금 특이한 취향의 책을 팔고 있는 시골의 작은 폐교이겠거니 생각했다. 사전에 책마을해리를 다룬 인터넷 기사에서도 그 이상의 인상을 받을 순 없었다.

그러나 책마을해리의 규모는 탐방단이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입구의 나무 위에 지어진 오두막부터 시작해서 주도서관, 박물관 겸 복합문화공간, 글쓰기 수업 등이 이뤄지는 교육관, 독립된 소규모 건물들로 이뤄진 전시공간과 작은 보조도서관, 공연장, 숙박시설 등의 규모에 탐방단은 적잖이 놀랐다. 규모도 규모지만, 책마을해리의 구석구석이 특정한 주제에 의해 세심한 손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

책마을해리의 강연장, 책감옥, 전시관 등의 공간들.

책, 그 본연의 가치를 순화시키는 것이 목표

탐방단이 방문했던 날에도 마을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정원과 건물 주변을 다듬고 가꾸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스태프와 책마을해리의 건물과 부지를 유지 보수하는 일꾼들까지, 한마디로 책마을해리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12여년 전 한 사람의 꿈과 용기, 그리고 결단에 의해 이뤄졌다. 이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는 책마을해리의 촌장인 이대건씨는 대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을까?

“책은 전시의 가치가 아니라, 그 내용이 읽히고 사회에 널리 통용되어 지적으로 자극된 또 다른 누군가가 글을 쓴다는 교통과 순환의 가치를 목적으로 합니다. 디지털 시대가 되었어도 책 본연의 물성, 그리고 책의 정동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치를 보존하고 지속하는 방법으로써 책마을을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책 쓰는 사람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새 책이 자꾸 나오게 만드는 것이 책마을해리의 이상이다. 책마을해리는 한번도 노선을 갈아타지 않았다. 책마을을 일구면서 소위 말해 돈 되는 사업으로의 전환에 대한 유혹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건씨는 책을 내세워 고급 요리를 판다던가, 책과 관련된 놀이공원이나 디지털 테마관 사업에 뛰어든다던가 하는 식의 한 눈을 팔지 않았다.

“딱히 관광지도 아닌 이런 시골에 내려와서 책마을을 하겠다니까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마을 사람들도 비협조적이었고요. 그래서 우선 마을 어른들을 저자로 만들기 위한 마을학교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어른들을 모셔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그 결과로써 책을 냈어요. <밭매다 딴짓거리>, <여든, 꽃>등이 그렇게 탄생했어요.”

마을 어르신인 김선순 할머니의 그림 재능을 발굴한 <여든, 꽃>의 표지.
책마을해리에서 펴낸 책들과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

모두가 ‘저자’, 책마을해리의 꿈

그가 현재까지 책마을해리를 이끌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 성공비결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저자 되기’였다. 그는 새로운 저자 한 명이 500권의 책을 출판하면, 500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이윤주’라는 필자가 책 500부를 찍으면 500명의 이윤주가 탄생하는 셈이라고 이대건씨는 말한다.

책마을해리가 이런 방식으로 저자를 새롭게 발굴하여 출판한 책이 100여권이나 된다. 책으로 마을공동체를 활성화한 덕분에 현재 책마을해리에는 지자체 공무원, 도서관 관계자, 도새재생 관계자 등이 벤치마킹하기 위해 견학하러 오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책마을해리의 촌장 이대건씨는 지역사회 공헌을 인정받아 아쇼카 펠로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쇼카는 빌 드레이튼이 설립한 재단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계 곳곳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체인지메이커들을 선정해 그들을 지원하는 아쇼카 펠로를 운영한다. 이대건씨는 우리나라에선 12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아쇼카한국(이혜영 대표)은 선정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역재생은 관광, 일자리 창출 등 경제적 차원의 개발에만 그치고, 그 과정에서도 지역민의 대부분이 소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책마을해리는 지역민들을 문화의 생산자가 되도록 도우면서 책을 통해 지역공동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점이 놀라웠다.”

책마을해리의 입구에 위치한 나무 위 오두막.
책마을해리의 주도서관과 독립된 소형 전시관의 모습.

공동체 활성화 방법의 한 모델

강릉지역은 예향, 문향의 도시라고 자부하지만 내세울만한 지역출판사 하나 없다. 책마을해리가 주도한 지역 출판인들의 대규모 축제였던 ‘고창 한국지역도서전’에 참가한 강원 지역의 출판물은 타 지역에 비해 그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강릉 지역은 강릉문화원과 강릉문화재단에서 기획하는 관 주도 사업의 대부분에서 지역민 배제와 소외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공공 문화사업의 대부분이 이미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이들의 나눠먹기에 그치거나, 관광 진흥을 위한 보여주기 식 대형사업에 편중되다 보니 수도권 문화역량에 의존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현재 지역사회에서 도시재생이나 공공 문화사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책마을해리의 사례를 더 자세히 탐구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책마을해리는 자신들과 같은 책마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길 바라며, 이제 책이 중심이 된 대안학교를 꿈꾼다. (끝)

 

탐방단=이성문, 신정윤, 윤문석, 이경하

[탐방단은 강릉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구성되었습니다. 본 탐방취재는 도시재생, 마을만들기 등의 지역사회 현안에 대한 사례 탐구를 위해 시민들에 의해 직접 기획되었습니다. 본 기획에 대해서 관련기관이나 단체의 지원이나 후원을 받습니다. 탐방취재 문의, 탐방기획 후원 및 지원에 대해서는 moon609kiki@gmail.com 으로 문의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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